정순왕후는 조선의 왕비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고, 가장 어린 나이에 왕대비가 되었고, 가장 어린 나이에 대비의 자리에서 쫒겨난 인물이다. 물론 이 과정은 그녀의 뜻과는 무관하게 진행된 일이었다. 그녀는 단지 시대를 잘못 만나 왕비가 되었고, 다시 대비가 되었으며, 결국 대비에서 폐출되어 서인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정순황후가 왕비로 산 시간은 고작 1년6개월에 불과했고, 대비로 지낸 시간도 2년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궁궐에서 쫓겨나 서인으로 산 시간은 무려 54년이었다.
1440년 6월4일, 여산 송씨 가문의 송현수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454년, 열다섯 살에 간택령에 의해 단종의 왕비로 책봉되었다.그러나 그녀가 왕비로 책봉될 당시 단종은 이미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숙부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비롯한 재상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독점하고 왕위를 노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왕비가 된다는 것은 단종과 운명을 함께하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보면 정순왕후는 단순히 시대의 희생자였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양대군은 1455년 윤6월 단종을 압박하여 상왕으로 밀어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짧은 영광은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의 짧은 영광은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녀가 열일곱 살이 되던 1456년 6월, 세조는 사육신 사건을 일으켜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출신 신하들을 처형하는 한편, 이듬해 단종을 이 사건과 연루시켜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보냈다. 단종의 유배와 함께 송씨도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녀의 비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단종이 유배된 뒤, 경상도 순흥에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죽였을 뿐 아니라 송씨의 아버지 송현수도 이 사건에 엮어 교수형에 처했다. 단종 역시 사약을 받게 되었지만, 사약이 내려지기 전에 스스로 목을 매 생을 마감했다.
이로써 송씨는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자신은 역적의 자식으로 서인으로 강등되는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궁궐에서 쫒겨난 그녀는 역적이 되어 멸문한 친정에도 갈 수 없었고 동대문 밖 청룡사라는 절 부근 산기슭에 초막을 짓고 근근히 생을 이어갔다.
남편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녀는 단종의 시신을 보지도 못했고 장례를 치르거나 묘지를 방문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소복을 입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 거북바위에 올라 단종의 유배된 영월쪽을 바라보며 곡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애절한 곡소리는 산기슭을 울려 퍼졌고, 이 때문에 그녀가 곡하던 봉우리는 ‘동망봉’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는 ‘동쪽’을 바라보던 봉우리라는 뜻이다.
그녀의 곡소리는 얼마나 애달팠던지,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넘어 마을까지 울려 퍼지면 마을의 여인들 또한 가슴을 치며 함께 울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동정곡’이라 불렀다.
82세의 나이로 그녀가 세상을 떠난 1521년까지, 한 많은 삶은 이어졌다. 그녀는 초라한 초막에서 옷을 염색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세조가 가끔 식량을 보내왔으나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왕비로 신원된 것은 사후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24년) 이었다. 이때 단종이 묘호를 받고 그의 묘가 장릉으로 격상되면서, 송씨 또한 정순황후로 추복되었다. 그녀의 신위는 종묘에 모셔졌고 묘지도 능으로 격상되어 ‘사릉’이라 명명되었다.